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기존의 관습이나 익숙한 것을 바꾸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표준에서도 마찬가지구요. 지난 번에 인증표준이야기에서 도량형을 통일한 이야기를 잠시 다루었는데요. 이게 단순히 산업의 발전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 생명이 달린 경우, 규격 통일의 당위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겁니다.

한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1904년2월7일 일요일 오전 10:23 미국 메릴랜드주 인구 50만의 도시 볼티모어 도심의 존 허스트 빌딩(John E. Hurst & Company building)에서 발신된 화재 경보가 소방서에 접수되었습니다. 이 화재 경보는 볼티모어 시를 최악의 화재 현장으로 만들어 후에 미국 건국(1776년) 이래 최악의 화재 중 하나로 꼽히는 [볼티모어 대화재(Great Baltimore Fire)]라고 불리게 되는데요. 존 허스트 빌딩에서 시작된 불은 건물을 폭발시키는 것도 모자라 때마침 불어온 남풍을 타고 근처 건물들로 퍼지게 됩니다. 긴급 출동한 볼티모어 소방관들은 자체 인력만으로는 화재 진압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인근 지역 소방서에 긴급 지원을 요청하고, 몇 시간 지나지 않아 필라델피아(Philadelphia), 윌밍턴(Wilmington), 워싱턴 DC(Washington, D.C), 체스터(Chester), 해리스버그(Harrisburg), 앨투나(Altoona) 지역의 소방차들이 현장에 도착하여 최악의 사태는 막을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지만(기차 사고로 늦긴 했지만 8일에는 뉴욕에서도 소방차가 도착합니다),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발생했습니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소방 장비에 대한 국가 표준화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아 도시마다 각각 다른 소방장비 표준을 운영하다 보니 다른 지역 소방차에 달린 호스가 볼티모어 소방전과 규격이 맞지 않아 연결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죠. (1903년 기준, 미국에는 소방 호스 커플링(couplings)에 대해 600가지 이상의 크기와 종류가 있었다고 합니다.) 소방 호스에 무명천을 감는 등 여러가지 임시방편도 소용이 없었고, 결국 주변의 존스 폭포(Jones Falls)에서 물을 공급받아 다음날인 8일 오후에야 겨우 불을 잡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570,000㎡ 면적에 1500여개의 건물을 잿더미로 만들어버린 대참사도 충격이었지만(구글에서 1904 Great Baltimore Fire로 검색하시면 그 때의 사진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 많은 인력과 장비가 투입되고도 소화 장비 규격이 달라 제대로 진압 시도조차 할 수 없어 더 큰 참사를 부른 상황이 사회적 인식을 전환시킵니다. 이 일로 소방 장비 표준화의 필요성을 절감한 미국 당국은 National Fire Protection Association(NFPA) 등을 중심으로 미국 국내의 소방 호스 커플링과 소화전을 단일 규격화하여 이후 이러한 사태가 재발하지 않도록 했습니다. (물론 표준화된 규격이 실제 사용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긴 했습니다만) 그리고 볼티모어 시는 이 사건을 계기로 건축물 기준(building code)을 채택하고 내화 재료(fireproof materials) 사용을 강제하기도 했습니다. 그 외에 또 다른 예로는, 지난 번 글에 잠시 언급했던 NASA의 경우, NASA는 미터법을 사용하지만 탐사선 제작업체인 록히드마틴 사에서는 미국에서 통상적으로 사용하는 야드파운드법을 사용하는 바람에 데이터 오차가 발생하여 1999년에 화성기후궤도탐사선이 폭발하는 대참사가 빚어지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도 표준화가 필요한 분야가 있다면, 대참사를 겪고 나서야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식이 되지 않도록 규격 통일의 중요성을 간과하지 말고 미리미리 노력을 해야할 것 같습니다. (물론 요즈음에는 규격 때문에 인명 참사가 일어날 분야는 별로 없는 것 같고요(그럴만한 분야는 이미 규격 통일이 대부분 다 이루어진 듯 합니다.) 산업계에서 또는 국제 통상에 있어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기 위해 표준화가 추구되는 것 같습니다.)

# 볼티모어 대화재 참고 자료:

https://rawhidefirehose.com/blog/great-baltimore-fire-setting-standards/

https://en.wikipedia.org/wiki/Great_Baltimore_Fire